1961년 辛丑 53세

주교동 김의환 씨 댁과 종로 5가 施衆한의원(피현 출신 박 장로와 공동 경영)에서 수많은 난치, 불치병 환자를 고쳐주었다. 이 무렵 서울 장안에서는 '妙香山 活佛이나타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었다'는 소문이 한동안 사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5·16 무렵 上京하여 親知들의 집에 머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준다.이때 쑥뜸으로 광나무 某寺의 소경 魚大師의 눈을 뜨게 하는 치료에 성공한다. 당시48세의 어 대사는 17세 때 열병을 않다가 視神經이 끊어져 소경이 된 이래 30여년동안 절에서 부처님께 다시 눈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으나 영험이 없자 좌절해 있던 참이었다. 절에 온 기도객으로부터 묘향산의 活佛이 서울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 물어 찾아와 '靈灸法'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뒤40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뜸을 뜬 끝에 視力을 회복, 잃었던 光明을 되찾은 것이다. 어 대사는 그 뒤 10여 년 동안 7명의 소경을 손수 뜸으로 고쳐주고는 58세 되던 해 生을 마쳤다. 이 무렵 소문을 듣고 아들과 며느리를 보내온 마포의 어느 할머니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는데 자신의 눈도 보게 해달라고 간곡하게 청하여 이에 뜸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할머니는 단 하루만 살아도 좋으니 꼭 눈을 보게 해달라고 졸라대어 부득이 또 '靈灸法'을 일러준 것이다. 그 할머니는 단 한 번만이라도 밝은 세상을 보고 싶은 일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더니 마침내 40일 만에 기적 적으로 광명을 되찾았다. 30대의 어느 여인은 결혼하기 전에 척수염을 않은 적이 있었는데 결혼하여 아이를 출산한 뒤 급작스레 악화되어 허리가 굽어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앉은뱅이'가 된 것이었다. 김옹의 지시에 따라 단전과 양쪽 足三里혈에 쑥뜸을 뜬지 60여 일 만에 허리가 펴지고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해1백 여 일 만에 가까스로 제 힘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3년간을 계속 뜨더니 몰라볼 정도로 치유되었다. 이때 간질환자, 곱사, 뇌염, 폐암, 폐결핵등 고치기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을 救療하였다. 「仁山」이라는 號는 독립운동시 묘향산 등 名山에 은거하며 仁術로 活人救世의 異蹟을 보였다 하여 石溪 文彬 先生과 希山 金承學(임시정부 독립운동 사장 겸 주필) 先生, 充齋 金斗運(平北의 大儒) 先生 등이 붙여준 호이고, 一勳이란 이름은 해방 후 스스로 改名한 것이다. 舊韓末 義兵대장 柳麟錫 선생의 제자인 김두운 선생의 門人으로서, 해방 직후 華西 金恒老의 손자인 李廣庵 先生에게 易秘傳과 中庸圖看 등을 전수받은 바 있다.

1962년 壬寅 54세

삼양동 북한산 기슭에서 산을 파내고 지붕을 얹어 토굴을 만들어 살다가 셋방을 얻어 전전하였다. 이때 1년 평균 4~5차례씩 이사를 다녔다. 재취 양씨를 맞아 四男 윤국을 얻음.

1964년 甲辰 56세

삼양동 북한산 기슭 임야에 15평 규모의 기와집을 손수 건립하여 입주함으로써 최초의 살림집 장만. 이해 8월 20일 취적신고하고 12월 30일 아이들의 출생신고로 이곳이 본적이 되었음. 당시 주소 성북구 미아동산111번지, 원적은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친마리 153번지.

1965년 乙巳 57세

재취 양씨와 이혼하고 충남 대전시 신흥동으로 주거지를 옮겨 과거에 잠시 동거하다 별거해온 대덕군 탄동의 재취 김씨와 재결합하였음.

1967년 丁未 59세

서울 중구 충무로 5가로 주거지를 옮겨 聖惠한의원 개설. 이 무렵 某 기업 회장 아들이 飮毒으로 인한 사망 직전에 쑥뜸으로 구하는 등 수많은 환자와 急死者들을 구제하였다.

1969년 己酉 61세

충무로 5가 양모 변호사 소유 2층 집으로 주거지 옮김. 환갑 맞음

1970년 庚戌 72세

주거지를 종로구 수송동 혈액은행 건물로 옮김. 이때 家財를 기울여 오핵단, 죽염등 각종 암약을 실험. 이 무렵 (대한화보) 71년 11월 호부터 72년 7월 호까지 8면에 걸처 '神宗哲學 易秘傳' 기사 연재. 극심한 火傷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오이생즙을 먹여 구하는 등 무수히 구제.

1973~74년

수송동에서 종로구 창신동, 중구 장충동등지로 이사 다니다가 7월 14일 경남 함양군 함양읍 상동으로 주거지를 옮김.

1975~78년

함양읍내에서 교산리 봉강, 상동 155-3번지 등으로 주거지를 옮겨 다니다가 78년 11월 서울 도봉구 수유동 397의 1번지로 이사함. 이 기간 중 '醫藥富國의 길'을 제시하는 내용의 대통령께 올리는 建議文을 일곱 차례 제출. 서울역 앞 동자동 고려한방병원에서 난치병 담당 고문으로 病者구제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