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乙未 47세

여름 6월에 계룡산 서편 上道里 龍華寺 골짜기 정두채씨 사랑방서 次男 윤세 얻음.

1955~56년 47~48세

서울 종로1가 평택여관(화신여관)에 묵으면서 이기붕 방조기관성격이 짙은 삼일정신선양회 조직에 참여 활동. 同會의 총재는 당시 부통령 함태영 선생이고, 부총재는 김병로 선생이었다. 이 회는 처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함태영 부통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은진의 최영호 선생이 김일훈 옹을 찾아와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하여 上京, 경무대 서장 金長興의 안내로 들어가니 이 대통령은 '함 부통령에게 부탁해 놓은 일이 있으니 꼭 힘써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서소문 함 부통령 댁으로 찾아가니 함 부통령은 삼일청신선양회 전국포직책임을 맡아달라고 하여 이를 거절하였으나 함 부통령과 김병로 선생의 强勸으로 조직 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구한말 남판서의 아들로서 독립 운동가이며 함 부통령과도 친한 사이인 낭상철 선생을 찾아가 중앙회 회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 승낙을 받았다. 이에 서울의 조직과 기타 작업은 남 회장이 맡고 김 옹은 지방조직을 맡기로 약정하고 이후 조직 업무를 마친 뒤 곧바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삼일정신선양회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만 실제로는 선거운동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6년 丙申 48세

충남 대전시에서 차녀 윤정 얻음

1957년 丁酉 49세

여름에 계룡산 도화동을 떠나 전북 남편과 운봉에서 한 달 가량 살다가 경남 咸陽으로갔다. 함양에서는 名醫로 이름난 郵泰振의정약국 사랑채에서 두어 달 지내고 하한조의 백연리 山亭에서 또 두어 달 지냈다. 이때 함양읍에서 가깝게 지낸 인물들로는 정약국, 정태진, 함양 양조장 대표 노영인, 유림면장 허사원,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정연창, 휴천양조장 대표 정낙현, 하한조, 윤일병, 민영조(상월면 사람) 등이었다. 겨울에 함양읍을 떠나 휴천면 행정리(살구쟁이) 삼봉산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이계춘, 최동기, 林尙允 씨 등의 소유 빈집 또는 곁방서 살면서 함지박을 깎아 팔아다가 生計를 이어갔다. 함지박을 잘 파서 함지박 하나의 값으로 쌀 서 말 값을 받았다. 이때 함지박을 팔기 위해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오도재를 넘어 마천 장터까지 70~80리 산길을 오가기도 하였고 뒤에는 주로 30리 거리의 함양 장에 내다 팔았다. 이 무협 한 친구의 부인이 胃와 膽의 오랜 고질로 고생하기에 중완에 침을 깊숙이 놓았다가 갑자기 뽑으니 피 고름이 분수처럼 솟구쳐 한동안 방안을 적시었다. 부인은'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하다'고 시원함을 토로하였다. 침을 맞고 난 이후 그 부인의 오랜 고질병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1959년 已亥 51세

여름에 三男 윤수 얻음

1960년 庚子

4월19일, 학생들의 義擧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여름에 아내 장영옥이 세상을 떠났다. 장영옥은 과거 계룡산에 살 때 그네뛰기에 능숙하여 자주 그네를 탔다. 한 번은 누가 그네의 상단 부분을 통으로 거의 잘라놓은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타다가 마침 그네가 하늘 높이 솟구쳤을 때 그네 줄이 끊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重傷을 입은 적이 있었다. 이때 김옹이 약첩을 지어 복용케 하여 목숨은 구하였으나 후유증이 있을 것을 염려, '쑥뜸'을 뜨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장영옥은 '이런 세상에 무에 그리 애착을 갖고 살고 싶은 마음이 있겠느냐'며 사양해왔는데 이때 아이를 낳고 나서 腸 파열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삼남 윤수는 한동네 임상윤의 딸 순덕(당시 열서너 살) 등이 업어 키웠는데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오징어 마른명태를 자주 먹였으므로 횟배를 심하게 앓아 죽게 되었다. 김 옹은 이 무렵 서울로 갔다가 한동안 머물다 오곤 하였는데 언젠가 살구쟁이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횟배로 죽게 되었으므로 급히 죽염을 제조하여 '活命水'에 타서 먹여 치유시켰다. 겨울이 시작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삼봉산을 떠나 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중구민 현동에 있던 제자 이영복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고향 사람 金義煥의 요청으로 중구 주교통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옮겼다. 김의환은 평북 의주군 피현면 사람으로서 김 옹과 나이가 같았으며 주교동에서 사탕집을 하였으므로 '사탕집 영감'으로 불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