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戊子 40세

광복 직후 松雲 방주혁 선생과 김규식 박사댁에 머물며 宋鎭禹 金性洙 金凡夫 鄭寅普 張德秀 金俊淵 趙炳玉 金炳魯 등과 從遊하며 國事를 論議한다. 白性旭 박사와 세 차례 비밀리에 만남을 갖고 庚寅사변(6·25)에 대한 대비책을 수립했으나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있던(50년 2월~8월) 白박사의 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좌절되고 만다.이에 앞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최영호, 이명룡 선생의 인도로 경무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한방의학과 서양의학의 장점을 상호 수용하여 국민보건향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양방 종합병원의 설립과 한의과대학설립, 防凌의 한방이용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건행정의 실권을 갖고 있던 미국인 보건담당 고문의 반대와 한방의학을 무시하는 양의계 보건행정당국 관리들의 비협조로 '한국 의학 발전을 위한 百年大計'는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계룡산으로 落鄕하여 불암리 우적동(골) 삼신당, 불암리 1구 불암사, 불암리3구 백암동 서문달 등지에 머물면서 五核丹, 竹鹽 등 암약 실험과 글방 訓長, 산판木物 등으로 生計를 이어갔다. 계룡산 삼신당에 살 때는 독립지사 정원경의 큰 아들 鄭運福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한해 여름을 그곳에서 宿食하였다. 이때 만주에서 독립 운동하던 독립지사 이현익도 그곳에서 함께 기거하였다. 정운복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殉國한 아버지 정원경을 생각하여 논밭을 팔아서 독립지사 생활비를 지원하였다. 당시 정운복의 가족은 경찰관으로 일하는 世福과 광복(6.25때 사망)이 있었다. 백암동 서문달에서는 나무를 해다가 엿 달이는 집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김 옹은 이에 앞서 고향에 있던 아버지 경삼 옹, 구성군 천마면에 있던 아내 張永玉과 함께 越南하였다. 이해에 첫 아이로 딸 부남을 얻는다. (1950년에 딸 부남은 사망)

1950년 庚寅 42세

내무부장관 백성욱 박사와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였으나 백박사의 進言이 묵살됨에 따라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 해 3월에 부산으로 가서 世春한의원을 개설, 운영하였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1년 辛卯 43세

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마곡사 냇물 건너편 참나무쟁이 지와막 김효생씨(기와공장 기술자) 곁방서 살았다. 지와막에서는 주로 산판에서 木物일로 생계를 삼았다. 1952년 壬辰 44세 윤 5월에 아버지 경삼옹이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조선 고종 9년(壬申 , 1872)에 태어나 1910년 순종으로부터 通川郡守로 발령받았으나 한일합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했다. 마곡사서 북쪽으로 약 2km 거리의 동해리 태화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 음력7월에 장남 윤우 얻음.

1953년 癸巳 45세

겨울에 논산군 삼월면 상도리 桃花洞 박살미 계룡산 감나무골 정두채 씨(농부) 사랑방으로 이사하였다. 상도리는 본디 노성군 상도면이었는데 일본 통치이후 논산군 상월면 상도리로 개편되었다. 박살미는 그곳에 朴씨들이 주로 많았으므로 朴山메라 부르다가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대개농사를 지어 살았다. 삼도리 상월 국민학교까지는 20여리나 되는데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