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국 임시정부 6년 1924년 甲子 16세

이해 가을, 의주에서 친구들 네 명과 힘을 합해서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광복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몇 번의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 하였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며 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을 100리 거리의 장터에 나가 팔아서 양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仁術로써 病苦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였다.

1926년 丙寅 18세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 기슭에서 대나무에 소금을 다져 넣고 굽는 것을 아흡번 만복하여 '竹濫'을 완성시켰다. 11월 25일 할아버지 金冕燮옹이 향년 75세로 별세하였다. 철종 3년(壬子, 1852)에 태어나 향교의 典校를 역임하였고 儒學者이자 名醫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1927년 丁卯 19세

평안북도 영변 장터에서 두 번째로 竹鹽을제조하였다. 손수 풀무를 만들고 드럼통을 구하여 소각로를 제조한 뒤 전남 담양에서 대나무를 구하여 천일염 50kg들이 50포대를 구워내 경비를 댄 친구들과 나누어 썼다. 이때 죽염을 이용, 만성위장병 환자들을 치료해주었고 쑥뜸요법과 병용하여 통장진 수력전기 6호 갱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진패증을 고쳐주었다. 이 무렵 황해도 봉산군의 석탄광산인 사리원 탄광에서 함께 일하던 광부가 진폐증으로 죽게 되자 죽염과 한약,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白芥子(妙末), 杏仁(妙末), 대추, 생강, 원감초를 각각 1근 반씩 한데 두고 달여서 그 탕액을 죽염과 함께 하루 10여 차래씩 복용하여 10일 이 경과하니 호흡이 편해지는 등 효과가 나기 시작하였으며 쑥뜸요법을 병용하여 6개월 만에 죽음의 병 진폐증을 완치시켰다.

1934년 甲戌 26세

봄철의 어느 날, 금강산에 숨어 있던 철원경찰서 습격사건의 주동자 변창호의 부탁에 따라 철원으로 가던 도중 金化郡 金城面에서 서로 얼굴을 아는 조선인 일본형사 李熙龍에 의해 붙잡혀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 되던 어느 날 작업 도중에 탈출하여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이 무렵 오대산의 方漢岩, 예산 덕숭산의 宋滿空, 金水月, 백벽산의 姜보살(이름 未詳) 등 善知識들과 道要를 문답하기도 하였다.

1942년 壬午 34세

充齋 金斗運, 康齋 文昌洙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해 주동 인물이 모두 체포됨에 따라 또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에 은거하였다. 이때 김두운 문창수 김형로 최니학(최용컨의 父)이 주동인물로 검거되어 사형이 확정돼 문창수 형제와 최니학은 사형이 집행되고 김두운과 김형로는 1945년 8월17일에 사형을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8월15일 조국광복을 맞아 석방되었다.

1943년 癸未 35세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의 인동 張씨 집안과 인연이 닿아 1942년부터 왕래가 있던 중 이해 여름 그 집 규수(소녀) 張永玉과 약혼을 하였다. 장영옥은 1930년(庚午)생으로 이때 열네 살이었다. 충재 김두운 선생도 이때 女息과의 定婚을 제의하였으나 장씨 집안과의 先約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1945년 乙酉 37세

8월 15일 조국 광복을 맞아 은신해 있던 의주 천마산 靈德寺에서 下山하여 충재 김두운 선생 댁을 예방한 뒤 16일 밤 기차를 이용, 이튿날 오전 서울에 도착하였다. 여운형 선생 댁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松雲 방주혁 선생 댁으로 초청되어 주로 그곳에서 머물면서 김규식 백성욱 이명룡 최영호 백운계 송진우 김성수 김범부 정인보 장덕수 김준연 조병옥 김병로 등 애국지사들과 從遊하며 國事를 의론하였다.